당그니의 일본표류기


어제 일순간 세상의 모든 바람이 멈춘 것 같았다.

 한동안 맹위를 떨치던 꽃가루 알레르기 일명 화분증(花粉症)의 증상이 갑자기 약화되었기 때문이다. 문득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시간이 정지했다. 지난 한달 동안 숨을 편하게 쉬지 못하고 안경에 김이 서리는 것을 감수해가면서 마스크를 쓰고 외출했었다.
 멈췄던 바람이 돌아와 코와 입을 통한 뒤 어딘가로 빠져나간다. 세상이 새롭게 뚫린 기분이다. 그러고 보니 지금 3월 중순. 시기가 벚꽃이 피기 직전, 슬슬 삼나무 꽃가루 날리는 시기가 끝날 무렵이다. 모든 것은 끝이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는 명작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이 작품은 '부해'라고 하는 맹독성 가루를 내는 지역이 배경이다. 세계는 이미 '부해'로 점점 덮혀가고 있다. '바람계곡'이 아니라면 마스크를 써야 한다. 부해는 자연을 오염시킨 인간에 대한 복수다. 부해에서 마스크를 벗는 것은 곧 죽음을 뜻한다. 
 대부분의 미야자키 키즈들이 그렇듯이 나도 '라퓨타'를 거쳐, '토토로'를 만나고 '나우시카'에 안착했다. 그의 작품에 한참 열광할 때 풀리지 않는 궁금증이 있었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가 주는 테마 즉 환경파괴나 핵무기 등은 식상했지만,어떻게 그는 '부해'라는 발상을 할 수 있었을까였다. 세상이 '부해'로 뒤덮히고 사람들은 그 흔한 공기도 제대로 마실 수 없다는 발상. 그 질문을 갖게 된 것이 99년이었으니까 10년전 질문이다.

 일본에 건너와서도 한동안 깨닫지 못했던 그 긴 물음의 해답의 실마리를 최근에 찾았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의 발상은 분명 '일본'이라는 환경적 특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 '원령공주'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누가 봐도 일본이라는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으나 '나우시카'만 해도 메시아적 분위기와 서구 유럽의 한 마을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라 '무국적'이라고 해도 맞을 것이다. 
 그러나, '화분증' 때문에 일본 인구의 15%나 되는 사람들이 꽃가루 알레르기를 앓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상황이 달라진다. 일본에 삼나무가 대량으로 심어진 것은 패전 직후. 삼나무가 다른 나무보다 빠르게 성장한다는 이유로, '효율성'. '경제성'이라는 이름으로 일본 전역에 대량으로 심어졌다. 인간의 이기심과 욕심을 먹고 자라난 삼나무는 그 20년 후 엄청난 양의 꽃가루를 도심으로 날려보낸다. '나우시카'처럼 '부해'의 복수가 시작된 것이다.

 일본에서 본격적으로 꽃가루 증상이 나타난 것은 65년. 도쿄 올림픽 이듬해다. 그리고 사회적인 문제로 대두한 것이 1982년이다. 1982년은 1965년에 비해 무려 4배나 많은 꽃가루를 삼나무들이 토해냈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가 애니로 발표된 것은 1984년. 원작만화를 발표한 시점이 1981년이므로, 화분증이 본격적으로 일본사회를 뒤흔든 해로부터 그리 멀지 않다.

 야후 재팬에서 '나우시카'와 '화분증'을 넣고 검색해보았다. 직접적으로 미야자키가 '화분증'에서 힌트를 얻어서 '부해'를 창조해냈다고 하는 글은 찾지 못했다. 그러나 21세기 일본을 사는 젊은이들의 블로그에서 '화분증'을 겪으면서 '나우시카'에 나온 마스크를 떠올린다는 글을 찾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도쿄역, 출근길 2009, JPNews> 

 일본의 삼나무 꽃가루가 사람을 괴롭히다는 뉴스가 한국 사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저 엄살 같아 보인다. 그러나 일본에서 이렇게 화분증으로 고생하는 나도 한국에 가면 말짱하다. 차라리 터미네이터가 출몰할 거 같은 누우런 하늘로 세상이 뒤덮히는 황사가 화창한 날씨에 암살자처럼 침입하는 꽃가루보다 낫다.
  일본 삼나무 꽃가루가 쏟아내는 양은 엄청나서 멀쩡한 사람도 눈이 가렵거나 기침을 해댈 정도다. 가만히 있어도 꽃가루가 코로 벌레처럼 파고 든다. 그리고 무력화시킨다. 화분증을 겪고나면 세상은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된다. 

 더 답답한 것은 매해 봄마다 이런 잔혹한 신고식을 치뤄야한다는 거다. 행여 내가 일본을 떠난다면 꽃가루 때문일지도 모른다. 
 한가지 위안이라면 모든 위대한 창작물의 뿌리는 그가 발딛고 사는 현실에서 나온다는 사실실감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인간의 이기심이 만들어낸 자연은 언젠가 이렇게 복수를 한다는 것을.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와 현실은 그리 다르지 않다.

  어쨌거나 삼나무 꽃가루가 물러간다. 한달간 일본을 뒤덮던 부해가 걷히고 있다.

 드디어 진짜 바람이 돌아온 것이다!!!!!
 이제서야 진짜 봄을 맞을 수 있을 거 같다.



Posted by 당그니
인생의 갈림길에서/감상 노트 l 2009/03/17 0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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