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그니의 일본표류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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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후지산, 지난번 블로거 컨퍼런스 가면서 운 좋게 찍은 항공사진

 일본은 한국에게 가깝고도 먼 나라라고 한다. 관심을 끊고 살아도 별 상관없는 나라 같기도 하지만, 사실 알게모르게 여러모로 부딪히는 경우가 많다. 가깝게는 독도문제나 역사적인 문제로 늘 부딪히고 있고, 무역관계, 한류, 드라마, 야구 등 여러가지 경로로 우리는 일본을 접한다. 또한 스포츠경기가 있을 때면 싫건 좋건 지역예선에서 만날 수 밖에 없다. 야구, 축구, 농구, 핸드볼 등등.

 따라서 가끔 일본이 어떤 방식으로 자국민들을 훈육시키고, 사회를 운영하고 있는 지 알아보는 것은 일본에 대해 관심이 없는 사람일지도 필요한 일일지 모른다.(싫음 말고) 오늘 할 이야기는 물론 거창한 국가론은 아니다. 일본 사회를 운영하는 주요 원리 중 하나인 매뉴얼에 관한 이야기다.



2.
얼마전 아는 사람 집에서 하루를 묵고 새벽에 거리에 나섰다. 길을 건너서 새벽첫차를 타고 집에 갈 참이었다. 바람이 세게 불던 그날, 신호등 앞에 서서 나는 버튼을 눌렀다. 일본 거리의 신호등은 새벽이 되면 저절로 파란불이 켜지지 않는다. 보행자가 버튼을 눌러야만 신호가 작동한다. 이것은 아무도 다니지 않는 밤에 원활한 차량흐름을 유도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고, 보행자에게는 오래 기다리지 않고 길을 건널 수 있게 하는 배려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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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보통 작은 골목 등 차량통행이 그리 많지 않은 곳에는 이렇게 신호등 아래에 버튼이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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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이 버튼은 몸이 불편한 사람이 좀더 오래 건널 수 있도록 설치한 버튼 

 보통 버튼을 누르면 얼마 있지 않아 보행신호로 바뀌는 데 그날은 웬일인지 한참동안이나 바뀌지 않았고, 차들도 지나다니지 않아 그냥 건너고 말았다. 내가 건너자 마자, 신호가 바뀌었는데 나는 전철역으로 가다 말고 사람이 다니지 않는 횡단보도 신호를 잘 지키는지 잠시 지켜보았다. 역시 반대편에서 달려오는 차량은 정지선에 정확하게 멈춰섰고 신호가 끝날 때까지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매뉴얼 대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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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아무도 건너지 않아도 일단 지키는 정지선

3.
지하철에 들어섰다.
예전부터 계속 봐왔던 것이지만, 이 날은 작정하고 일본 지하철 통로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가만 살펴보면, 하나의 통로 안에 올라가는 곳, 내려가는 곳에 대한 표시를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하여 끊임없이 정해진 루트로 유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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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정산도 줄 맞춰서 해라....-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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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줄맞춰서 오르락 내리락 할 것!! 노란선 침범 금지?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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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끊임없이 교통정리하고 있는 일본전철의 유도선 및 좌측통행안내. 계단 입구에도 '좌측통행'이라는 간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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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지하철 2호선 강남역, 시원한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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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지난 주 블로거 컨퍼런스 차 한국에 갔을 때 찍었던 서울 교대역 환승 통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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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롯폰기역, 행여나 길을 헤맬까봐 몇군데나 팻말을 붙여놓았다.

한국과 비교하면 일본은 강박관념에 시달릴 정도도 팻말로 유도 문구가 많다.

외국인들이 일본 사회를 평하기를 '정하지 않은 룰이 룰인 사회'라고 한다. 보이지 않지만 사회 곳곳이 알게 모르게 매뉴얼화 되어 있고 행동양식이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전철에서는 핸드폰을 쓰지 말아야하며, 엘레베이터 안에서는 누군가 먼저 내릴 때 버튼을 눌러주는 것이 예의이며, 또한 건물 안에서 밖에 나갈 때 먼저 나가는 사람이 뒤따라 오는 사람을 위해서 문을 열고 난 뒤 잠시 잡아두는 배려를 잊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가식이든 아니든 잘 모르는 사람끼리 서로 스트레스를 주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매뉴얼인지 모른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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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철이나 정지선에서만 일본의 매뉴얼화가 느껴지는 것은 아니다.
최근에 200만부가 넘게 팔려서 빅히트한 '여성의 품격'이라는 책도 들여다보니 여성에 대한 매뉴얼이다. 이 책에는 여성이란 무릇 이래서는 안되고, 이래야 되며, 저래서는 안되고, 이러는 편이 더 품격이 있다는 내용으로 어찌보면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가 담겨있는데, 아마존 리뷰를 보면 '왜 팔렸는 지 모르겠다'는 평도 종종 보인다.
이 책이 성공한 데에는 '국가의 품격'이라는 책이 '품격'이라는 단어를 하나의 국가적 유행으로 만든 것도 있고, 저자인 '반도 마리코'씨가 여성으로서 성공한 사회인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매뉴얼'에 대한 일본사회의 욕구가 시의적절하게 반응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일본 내에서는 '실용적인 지식'을 잘게 쪼개고 정리해서 독자들이 알게 쉽게 책으로 펴낸 책이 넘쳐난다. 골치아프고 어려운 역사도 '한권으로 아닌 일본사' 한권이면 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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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내의 인간관계를 어떻게 할것인가' 부터도 영업방식, 총무, 비서 등 자신이 잘 모르는 분야에 대해서 알고자 한다면 관련 책을 찾아보는 게 제일 빠르다. 매뉴얼화되어서 나와 있지 않은 책이 없으니까. 최근에는 직장 내에 상사에 대한 말버릇이 없는 신입사원을 대상으로 '제대로 쓰는 경어'에 대한 책도 쏟아져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일본에서 성공한 한류상품이 비단 DVD 뿐 아니라, 관련 소설과 대본, 그 뒷 이야기들을 묶은 책이기도 한데, 여기에는 좋아하는 스타 및 드라마를 철저하게 매뉴얼화해서 분석해보고자 하는 욕망을 반영하기도 한 것이다.


5.
이런 매뉴얼은 어떤 의미에서 어떤 일을 처리할 때 정해진 프로세스를 만들어놓음으로서 누구나 쉽게 그 일을 처리하고 공유할 수 있게 만드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매뉴얼이라는 기준을 통해서 사람들을 통제하려는 욕망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부정 못한다.

새봄, 거리의 넘쳐나는 신입사원들이 '리쿠르트 슈트'라고 해서 모조리 다 검은색 정장으로 몸을 둘러싸는 것은 그만큼 암묵적으로 정해진 매뉴얼을 벗어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반증한다. 난 회사에 오는 신입사원 중에서 회색이나 파란 색도 조금 튀는 양복으로 입고 온 사람을 한번도 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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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리쿠루트 복장을 입고 찾아갈 회사를 찾는 한 사회 초년생

 일본 특유의 초등학생들이 메는 가방, '란도셀'도 그렇다. 꼭 법으로 규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모두들 이 가방을 메고 등하교를 한다. 이것에 벗어나면 뭔가 처벌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유난히 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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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란도셀 -_-;

6.
매뉴얼은 일본사회를 급속하게 성장시킨 하나의 동력임은 분명하다.
일본인 스스로 '매뉴얼을 위한 매뉴얼'이 있는 곳이 일본사회라고 말하기도 한다.
일본인들은 한국에서 어떤 물건을 수입할 때 '매뉴얼'을 가장 먼저 찾는다고 한다. 그러나 때때로 '좋은 제품'을 만들고서도 그것을 한눈에 알아볼 '매뉴얼'이 없어서 일본수출 계약이 제대로 성사가 안되거나, 파기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한다.  

매뉴얼이 없어서 우왕좌왕하는 것보다
모든 분야에 각기 필요한 매뉴얼은 정보의 공유, 확산을 위해 꼭 필요한 일이다.
문제는 지나치게 매뉴얼에 집착하게 될 때, 혹은 매뉴얼이 없는 경우 발생한다.

매뉴얼에 없는 경우를 부탁하면, 책임 소재가 불분명해지므로 대부분은 거절을 하기 마련이다. 한 예로 예전에 애니메이션 학교 다닐 때 매일 다니는 컴퓨터 작업실이 있었다. 매일 이곳에서 수업을 듣다보니 그곳을 관리하는 수위아저씨와도 안면을 트게 되었고 나를 포함한 학생들이 이 학교 학생이라는 것은 누구보다 그 수위아저씨가 더 잘 아는 터. 가끔 시간이 남아서 그곳을 이용하려고 하면 반드시 담임 강사를 통해 열쇠를 따고 들어가야했다.
 문제는 담임강사가 오지 못할 때다. 들어가서 작업은 해야겠는데, 아무리 수위아저씨에게 이야기를 해도 열쇠를 가지고 있다하더라도 자신에게는 권한이 없다며 절대로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이건 뭐 잠깐 이야기해서 풀릴 성질이 아니다. 매뉴얼에 없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정해지지 않은 룰에 대해서 담당자와 협상을 통해 어느정도 융통성이 먹히지만, 일본에서는 매뉴얼에 없는 경우 실무자와 그것을 협상으로 풀어나가기란 쉽지 않다.

천상, 일본은 어쩔 수 없는 매뉴얼 사회다.

7.
한국과 일본이 어떤 부분에 대해 부딪히는 일은 앞으로도 계속 있을 것이다. 스포츠의 경우는  실력을 배가 하여 정해진 룰에 따라 싸우면 되는 것이지겠지만, 국익에 관련된 문제는 또 다르다.
  이럴수록 일본이 어떤 매뉴얼에 따라 움직이고, 해외에는 어떤 식으로 자신들을 홍보하며, 국가적인 이익이 담겨있을 때는 어떤 방식으로 움직이는 지 알아두는 것은 중요하다.
 
 일본과 정말 제대로 맞서려면 지나치게 꼼꼼하다 싶을 정도로 사소한 것까지 정리해두는 일본인들의 성격에 맞춰 한국도 맞대응할 수 있도록 준비하지 않으면 안된다. 피곤한 일이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 제목을 '일본, 어쩔 수 없는 매뉴얼 사회'에서 '일본사회를 관통하는 키워드, 매뉴얼'로 바꿨습니다. 매뉴얼이라는 긍정과 부정의 두가지 의미가 있는데, 전자는 부정의 의미가 더 강한 것 같아서 말이죠.



최근글: 일본!! 치한으로 내몰리기 싫으니, '남성 전용칸'을 만들어달라!!



저의 세번째 책이 나왔습니다^^>
도쿄를 에세이처럼 읽으면서 일본어와 친해진다
->
도쿄를 알면 일본어가 보인다!!! 고고싱



* 히라가나 부터 기초문법, 현지회화, 한국어를 배우는 일본인까지,
->당그니의 좌충우돌 일본어  (만화로 배우는 일본어 연재중!!)
  




Posted by 당그니
일본! 이것이 다르다! l 2008/03/23 2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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