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그니의 일본표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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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일본인들이 아직 패전의 깊은 수렁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을때, 그들은 영웅의 등장에 열광했다. 우습게도 아이들 사이에서는 아톰이 자신들보다 몇배나 더 큰 로봇들을 때려부수고 그들 세계에서 영웅으로 떠올랐다면, 사회재건의 짐을 짊어진 어른들의 세계에서는 '역도산'이 등장, 자신들을 굴복시킨 양키들을 '가라데 춉' (가라데 방식으로 손으로 상대방을 공격하는 것)한방으로 날려버리고 있었다.
일본아이들이 순식간에 '백설공주'나 '미키마우스'에서 '우주소년 아톰'으로 상상의 영역을 옮겨갈때, 어른들은 아직 보급이 덜 된 거리의 TV 수상기 앞에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영웅 역도산은 그렇게 일본인들의 별이 되었다.

  함경도에서 태어나서 식민지시대에 요코즈나가 되기위해 동해를 건넜던 역도산. 프로레슬러로서 천황 다음으로 유명한 사나이가 되었다가 영원히 불귀의 객이 되고만 사나이. 조선인으로 태어나 일본인이 되었던 사나이는 동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양국의 영웅으로 남았다.
아직도 대다수의 일본사람은 역도산을 일본인으로 알고 있다. 역도산은 일본에서 단 한마디의 조선어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의 자식에게까지도. 그는 일본인으로서 스타가 되었고, 일본인이어야만 했다. 그러나 그는 형제들과 유소년기의 뿌리가 남아있는 조선에 대한 기억과 미련을 영영 없애버릴 수는 없었다. 그는 일본인으로 살아갔지만, 그의 가슴속 깊숙히 조선이라는 또 하나의 따듯한 강물이 흐르고 있었다.

  영웅 역도산'은 그런 의미에서 일본인 역도산의 모습과 한국인 역도산이라는 야누스적인 두가지 모습을 동시에 다루고 있다. 역도산에 대한 번역책이 대부분 일본인의 시각에서 다루어지고 있고, 일본을 제패한 영웅으로만 다루어지고 있는 반면에, 이책에서는 역도산를 통해 바라본 재일교포 사회는 물론, 그가 전후 일본에서 프로레슬링을 건설하면서 어떻게 일본인들을 구름처럼 몰려들게 했는지, 당시 방송국 등 일본의 정치,사회적 배경까지 자세히 다루고 있다. 역도산이 5,60년대 일본문화의 핵심키워드였던 만큼 우리는 이책에서 역도산을 통해 일본사회의 숨겨진 정경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역도산을 일본인이 아닌,한국사람으로 기억하고 싶어한다. 그가 일본인의 우상이 되었고,그 위를 군림한 만큼 그는 한국사람이어야 했다. 그럼에도 그가 평생을 일본에서 살면서 고국과의 관계를 생각하고, 느꼈는지 알려진 것은 별로 없다. 그런 의미에서 ‘영웅역도산’은 반쪽짜리 역도산을 조선인 역도산이란 측면으로 접근하여, 그동안 드러나지 않은 사실들을 철저하게 취재,수집,탐구하여 새로운 역도산 상을 만들어냈다.
  그가 왜 요코즈나의 문턱에서 스모의 촘마게를 자르고 프로레슬러가 될 수 밖에 없었는지. 조선인이라는 명제와 그의 성공은 어떤 관계가 있는지. 머릿끝부터 발끝까지 일본인이 되고자 했지만, 끝내 그가 자신의 굴레를 버릴 수 없었던 본질적 이유는 무엇인지. 왜 그는 극비리에 내한, 판문점에서 북쪽을 향해 절규해야했는지. 만경봉호가 북한으로 출발한 니이가타항으로 롤스로이스를 몰고 급히 가야한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는지. 그가 동경올림픽이 끝나고 꼭 이루고 싶었던 꿈은 무엇이었는지…..
  이 모든 것은 저자의 힘있는 전개를 통해 온전하게 드러난다.

 역도산은 젊은 나이로 야쿠자의 칼에 맞아 요절했지만,그의 인생은 결코 불행하지는 않았다. 한 시대를 풍비한 영웅으로 그만하면 멋지게 살다간 것이다. 그렇다면 역도산은 오늘 우리에게 무엇인가. 아톰이 일본아이들에게 ‘작은것이 아름답다’를 심어주었고, 과학기술입국 일본의 꿈을 제시해주었다면, 역도산은 미국에게 패배한 일본어른들에게 재건의 힘을 불어넣어주었다. 그 자신이 거구의 미국인 프로레슬러를 때려눕힘으로써 아톰처럼 공상만화속이 아니라 현실에서도 자신들을 굴복시킨 서양세계를 극복할 수 있음을 몸으로 증명해보였다. 오늘날의 경제대국 일본을 존재하게 한 5,60년대는 그렇게 영원히 조선인 역도산이 제시한 꿈들이 갈피갈피 숨어있음을 부정하지 못한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역도산을 다시금 새롭게 읽어야 할 의미이고, 한국인의 관점에서 다시금 읽어보는 역도산은 전후 일본문화의 폐부를 알 수 있는 키워드다. 또한 그것은 우리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아톰을 안다면 역도산을 제대로 아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영웅 역도산의 일독을 권한다.


Posted by 당그니
인생의 갈림길에서/길에서 만난 연인들 l 2007/05/15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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