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그니의 일본표류기


1.

 비디오를 보는 남자.


 내가 8년전쯤 아주 재미있게 읽었던 소설. 물론 그 소설은 지금 내게 없다. 이번에 서울,본가가 다른 곳으로 이사를 해서 아직 풀지 않은 박스속 어딘가에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을 것이다.


 임영태. 내가 좋아하는 작가다. 일본에 오고나서 사실 한국소설을 읽은지 꽤 되었다. 소설을 읽는 이유는 딱 하나. 문자로 배열된 세상과 이야기꾼들이 풀어내는 풍경은 영화와 달리, 영혼 깊숙한 곳을 때때로 울려주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직접적 경험을 간접적인 스크린을 통해 보여주는 모든 비주얼은 감각의 전이일뿐 뒤죽박죽 되어 있는 경험을 재배치해주거나, 재해석해주지는 못한다. 비주얼은 그런의미에서 '몸의 언어'이고, 소설이나 시, 혹은 글은 '상상의 언어'이자 '내면의 언어'이다. 


 


 


2.


비디오를 보는 남자가 있다. 이혼남이고, 그의 일상은 비디오가게를 여는 것으로 시작된다. 한때 나도 이 소설을 보고 장남삼아 비디오가게를 하는 것을 꿈꿨다. 세상이 뿜어대는 상승지향의 모델들이 신문이나 뉴스를 타고 넘쳐나지만 않는다면, 혹은 그런 세계의 정신없는 속도에 휘말리지 않을 자신만 있다면 비디오 가게를 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요즘 한참 망해간다고는 하지만)


 하루 종일 비디오속에 담긴 인생이나 엿보면서, 대여관계를 체크하고, 그리고 빌려가서 되돌려주지 않는 놈들에 대한 분노를 곱씹으며 사는 것. 어떻게 보면 엿같은 인생이지만, 이 소설의 주인공은 때때로 그런것에 약간 열이 받을뿐 특별히 개의치는 않는 거 같다.


 


 그의 하루는 비디오가게를 열고, 회수함에 들어온 비디오 테잎을 되감고, 그리고 커피한잔을 타는 것이다. 아침햇살이 나긋하게 비디오가게 유리창을 통해 산뜻하게 비칠때, 아침 청소를 하고, 손님을 기다린다. 그리고 가끔 주인공 특유의 쓸데없는 사색에 빠지거나, 몇편 이어서 본 영화를 혼자 주저리 주저리 평해본다. 어차피 비평이란 씹는 것이니...  


 


 


3.


이 소설을 읽고 밑줄친 기억이 있는데, 지금 내게 책이 없는 이유로, 그냥 기억에 의존해서 좀 더듬어 보면, 그가 어느날 커피를 마시고 유리문 바깥 풍경을 바라 보고 있을때 이야기다.


 낙엽이 떨어져서 바람에 날려가는 것을 보고, 그는 문득 깨닫는다. 이 느낌의 정체가 뭘까. 그는 한참이나 그 느낌의 정체를 생각해보다가, 그것이 중년의 느낌이란 것을 깨닫는다.


 청년의 시기가 지나고, 그렇다고 노년도 아닌....사실 언제까지 청년이고, 언제부터가 중년인지는 모르겠으나, 또 사실 먹고 살기 바쁘다 보면, 청년기며, 중년기며 따질 겨를이나 있을까. 그냥 애키우고, 내일을 혹은 10년후를 준비하기 바쁘니.....


 


 그리고 캐롤이 울려 퍼진다.


 


 '다시 제가 왔어요. 그때 그 시절, 그 사람들 기억나지요.'


캐롤은 늘 이렇게 말하는 거 같다며, 그 남자는 유년시절, 청소년시절의 크리스마스를 떠올린다. 그렇게 계절은 우리 곁을 빠르게 다가왔다가 어느틈엔가 떠나버린다.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주인공은 되뇌인다.


 


 유년시절 혹은 10대나, 20대의 풍경이란 지나야 비로소 알 수 있다는 것을 주인공(혹은 내가)은 깨닫는다. 한국을 떠남으로써 한국에서 나를 지배했던 질서를 깨달았듯이, 우리가 걸쳐있는 시간대는 그렇게 한참이나 지나야 비로소 전모를 드러낸다. 그러면 나는 잊고있던 인생의 중요한 필름을 되감아서 뒤져보는 상념에 빠지게 되고, 가끔 그런 멈춰진 시간속에서 엄정하게 계산된 사고대신, 멍하게 자신의 족적을 반추해보는 재미에 빠지기도 한다.    


 


 


4.


그런데, 막상 돌이켜보면, 당시의 그 시기란 어떤 색채를 띠고 있었다기 보다 엄청나게 많은  과제에 둘러 쌓여있었다. 뭐 그런게 모여서 한 시기를 규정하는 색채가 되는 것인지는 몰라도.... 


  이를테면, 고교시절 한참 감수성이 예민할때, 중간고사나 기말고사가 끝나면 친구들과 즐겁게 영화관을 찾고, 10년후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지만,실은 나의 일상을 지배하고 있었던건 대학진학이라는 거대한 관문이었다. 자잘하게 신경써야하는 각종 과목들의 점수관리였다는거....


 이십대 중반이 되어서도 선배들은 쇠를 삼켜도 될 나이라고 했지만, 삐그덕거리는 연애에 대한 사소한 불만이나, 시대가 주는 거대한 중압감, 불완전한 진로에 대한 고민을 젊은 청춘의 싱그러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현재도 그렇다. 오늘도 해야할 다양한 과제를 싸안고, 살아가는 이 시점에서 어떤 흥취에 빠져들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추억은 한편으로 나쁜 기억을 지우고, 좋은 것으로만 채색을 하는 거대한 망각의 수채화같기도 하다.


 


 


5.


 주인공은 이혼할 이유가 특별히 없었지만, 특별히 같이 살 이유도 없었으므로, 아내와 합의이혼을 한 상태다. 소설속에 설정에 지나지 않지만, 어쨋든 이 이혼남은 혼자 비디오를 보며, 유리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로 계절을 보내고, 한잔 커피에 썰렁한 생활을 즐긴다.


 


 나름대로 평온한 나날을 보내는 이 사람에게 생기는 변화란 우연히 비디오 회수함에 들어온 쪽지다!....


 


당신을 본 순간 문득 어떤 느낌에 휩싸였다며, 한 여자가 보낸 쪽지. 그리고 답변을 요구하고 있었다. 공은 문득 저쪽에서 이쪽으로, 나는 상대를 모르지만 상대는 나를 계속해서 관찰해왔고, 그런 느낌을 모아서 하나의 쪽지로 전달해온것이다. 주인공은 애들 장난도 아니고, 그냥 무시하려고 했지만, 묘하게 끌리게 되고.....이후의 스토리는 읽는 분들의 상상에 ㅎㅎㅎㅎ


 


 


6.


 느닷없이 비디오를 보는 남자를 떠올린건, 올해 가을이다. 작년까지 먹고살기 바쁘고, 일본에서 자리잡기 바쁘다 보니 책 읽을 시간조차(실은 여유가 없었다는게 맞는 표현) 없었는데, 이렇게 횡설수설 떠들 수 있다는 것은 그 만큼의 잉여의 시간이 생겼다는 뜻인데.....


 


 이럼 일단 가끔 계절의 변화에 민감해지기도 하고, 낙엽 몇장에도, 덕수궁 돌담길에 깔렸던 은행나뭇잎을 추억하기도 한다.


 


 비디오를 보는 남자는 이제, 인터넷 시대를 맞이해서, 한때 많은 사람이 극장 대신 비디오를 통해 여가를 보내던 때와는 다른 살벌한 생존경쟁의 장으로 몰릴 것이지만, 나는 아직도 그가 아침 청소후에 타서 먹던 커피 속의 여유에 대해 생각해본다.


 그게 쓸데없는 상념 속이든, 아니면 낙엽 하나 만으로도 깨달을 수 있는 '중년의 느낌'이든 간에, 그런 속도가 정지된 시간속에 가끔 빠져들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것일까.


 


 월급, 지각, 출근, 지나가는 사람들, 너저분한 방과 쌓여있는 책들과 잊혀진 사람들, 개척해야할 미래, 지켜야할 일상이 넘쳐나는 시간속에서도, 가끔은 아주 가끔은 나도 '비디오를 보는 남자'처럼 멍청하게 창밖의 가을 하늘을 응시하고, 휴일 오후 2시의 햇살을 기억해보고 싶기도 하다.....


 


 


7.


  2주전 일본온지 5년만에 단풍놀이에 다녀왔다.


 문득 '고도를 기다리며', 혹은 '마지막 잎새' 이런 제목만 거창한 희곡들이 갑자기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가끔은 계절따라 낙엽더미속에 푸욱 빠져보는 재미라도, 혹은 그런 상상이라도 없으면 얼마나 삶이 무미건조할까. 그냥 그런 상상이라도 하면 쫒기는 일상속에서 한결 위로를 받는 거 같은데, 그게 설령 위선이라 할지라도. 나도 때때로 비디오를 보는 남자인 것을.


 


                                                                                                          04.11.15 당그니 씀


 








▲ 때때로 고독은 비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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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당그니
인생의 갈림길에서/길에서 만난 연인들 l 2005/10/23 2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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