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채현아 뭐해"
"코레네. 스나아소비 스룬다요!!"(이거, 모래장난 하는거야)
아빠는 한국어로 묻고, 아이는 일본어로 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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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래 장난 하는 아이들. 핑크색 모자가 딸래미. |
햇살이 뜨거웠던 가을 운동회. 채현이는 지루했는지 금새 다른아이들과 함께 모래에 손을 긋고 이리저리 그림을 그려본다. 쪼그려 앉은 아이를 보니 불현듯 아이의 아빠도 어느새 소년이 되어 있었다.
2.
그때 가을 햇살은 뜨거웠고, 내 얼굴은 벌겋게 익고 있었다. 우리는 영문도 모른채 줄을 맞춰서 행진을 하거나 앞으로 나란히를 해야했고, 무슨 춤을 추었던 거 같다. 하나도 즐겁지 않았던 초등학교 운동회. 선생님은 노란옷을 입고 오라고 했는데, 시장에서 어머니가 사오신 옷은 유난히도 목이 안들어가서 입을때마다 귀가 떨어져나가는 것 같았다. 게다가 무슨 커다란 숫자 같은게 박혀있어서 이런 옷도 괜찮나 싶었다.
운동장에서는 모래바람이 한차례씩 휩쓸고 가면, 가뜩이나 찡그린 이마위에 먼지가 내려앉는다. 시끄럽게 흘러나오던 스피커의 노랫소리가 귀속을 거칠게 파고 들었다. 우리는 길게 줄을 맞춰서 한참이나 쪼그려 앉아있어야 했다. 유일한 친구는 땅바닥. 모래도 아니다. 딱딱하게 굳은 땅위에 대충 근처에서 아무 돌멩이나 파서 그걸로 그림을 그린다.
멀리 구령대를 보니 선생님들은 시원한 천막 밑에서 음료수를 마시고 있었다. 왜 우리들은 이 먼지투성이 속에서 대기하고 있어야 하고, 선생님들은 저렇게 시원한 곳에서 의자에 엉덩이를 걸치고 있는 걸까. 내내 얄미웠다. 운동회가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정말 지랄같이 더웠던 날이었다. 그전에 시도 때도 없이 연습을 한 것도 지겨웠다. 그놈의 줄맞춰...
3.
내가 초등학교를 들어갔을때, 가방을 메고 학교에 가면, 사람들이 그랬다.
"가방이 너를 업고 다니겠다"
그 뒤에 쏟아지는 어른들의 웃음소리. 수십개의 바늘이 되어 등뒤로 꽂힌다.
학교를 일찍 들어간 탓에 유소년시절 내내 키가 작았던 나는, 어른들이 농담삼아 귀엽다고 한 이야기를 그냥 삼키지 못했다. 내내 학교 담벼락 그늘을 걸어가면서 곱씹었다.
가방. 가방. 가방이 나를? 왜 가방이 나를?
내가 운동회를 가장 싫어했던 것은 바로 '달리기' 때문이었다.
어른들이 보기에 애들이 뜀박질하는게 귀여워보일지 모르지만, 휘슬이 울리고 나서 뛰기 시작하면 극명하게 드러나는 일등과 꼴지. 나는 늘 뒤에서 세는게 빠를 정도로 뒤쳐졌다. 운동신경이 안좋은게 아니다. 다른 애들이 나보다 빠른거다. 그래서 매회 가을 마다 돌아오는 운동회가 되면 무슨 시험치는 기분처럼 달리기 순서가 오면 숨부터 차오고,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무엇보다 다른 애들보다 늦게 골인을 하는게 죽기보다 싫었다. 난 그때 저주라는게 어떤건지 맛을 본 셈이다. 저주받은 운동회!!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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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래된 필름을 다른 시간대에 보는 일은 낯선 일이다. |
오늘 보육원 운동회때 아이들이 뛰는 모습을 보고 웃는 나를 보았다. 물론 즐긴건 아니다. 그냥 아이들이 뛰는게 귀여웠을 뿐이다. 그때 나를 죽어라 달리게 한 어른들처럼.
한가지 틀린 점이 있다면, 채현이도 나와 다르게 반에서 다른 아이들보다 머리하나는 더 큰 편이라서 누구에게도 운동은 지지 않는다. 내가 자아를 인식할때부터 사춘기까지 극복하지 못했던 업보의 봉인을 채현이는 너무 일찍 풀어 버렸다.
아이들은 모래장난을 더 오래 할 시간도 없이 다시 손살같이 무대로 나간다. 그리다 만 그림들위로 어지러운 아이들 운동화자국이 선명하다.
작년에는 처음이라 신기해서 재미있게 보았던 운동회.
올해가 두번째인데, 벌써 지겨워졌다. 매해마다 이런 방식으로 꼭 할 필요가 있을까. 줄 세우고, 보여주기 위해서 연습하고...
5.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원시적인 상태의 동물을 인간세계의 룰에 맞게 길들이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어른들 편하자고 하는 것도 꽤 많다. 저렇게 해두면 관리할 필요가 없고, 이렇게 가르쳐두면 속썩을 일 없고. 가끔 아이와 씨름할때면 아이를 위한 일인가. 나를 위한 일인가를 혼동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어른들은 늘 바쁘고, 정신없고, 자기 욕망의 실현때문에 바쁘다. 아이가 갖는 무한한 세계의 들판을 들여다 볼 여유가 별로 없다.
운동회도 실은 그렇다. 얼마나 잘 통제되고 훈육된 아이들을 어른들에게 보여줄 것인가. 어른들은바쁜 시간속에서 아이들의 액기스만 뽑아서 보고 싶은 것이다. 아이들이 진정 운동회를 즐길 수 있을까. 단 하루를 위해 영문도 모른채 몇주를 연습해야하는 아이들. 재미나게 표현해보면 인간동물원 쇼 일 뿐이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런 조직적인 댄스보다 그냥 아이들을 들판에 풀어놓게 제 맘껏 장기를 뽐내게 하는 운동회는 없을까. 달리기 하고 싶은 아이는 달리기를. 공던지기 하고 싶은 아이들은 공을 던지고. 절대 줄 같은거 서지 말고.
6.
시간의 긴 발효기간을 거쳐 나온, 나의 초등학교 운동회를 떠올려보면 이제, 뚜렷한 선과 악의 경계가 사라져 있다. 아이 덕택에 숨겨진 필름이 순식간에 인화되어서 내 눈앞에 펼쳐졌을 뿐이다. 그때 아이 아빠가 이고 있던 가을 하늘도 오늘처럼 정말 파랬다.
아이와 아빠는 이렇게 같은 장소, 같은 시간속에서 다른 운동회를 만난다.
아주 오래된 운동회가 열렸던 그 날.
이렇게,저렇게.그렇게!!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다. 재생될 뿐이다.'
<아래 보육원 운동회 사진모음 >
http://blog.ohmynews.com/dangunee/Home.asp?Artid=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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